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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의 편지] ‘미추홀 백제’를 시작으로 ‘백제의 날’을 만들자.

기사승인 2018.05.03  15: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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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도범 발행인

역사는 일어난 사건이며 기록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기록’이라는 단어에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을 밝히기 위해 ‘왜곡’ 내지는 ‘오류’ 등의 키워드가 훗날 진실을 밝히는데 유용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오늘의 문제 제기는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시마네현은 일본에서 조차 알지 못하는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라는 관보 한 장을 근거로 ‘다케시마의 날’을 만들어 2003년 당시에 우리들의 공분을 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매년 2월 22일이면 언론들에서 기본적으로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을 비난하는 기사가 넘쳐나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행사에는 시마네 현의 ‘다케시마의 날’을 비난하며 스스로 입에 담아야 하는 어이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역사적 근거와는 거리가 멀게도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해 일본 전역과 세계를 향해 홍보해온 시네마현의 마케팅은 지난 13년의 시간 속에 우리의 후세들에게 독도를 공부하는 시간에 일본의 시마네현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치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우리는 ‘왜곡’이다 ‘날조’다 비난만 할뿐 지금도 사대부를 자랑으로 삼듯 턱수염만을 만지고 점잔을 떨며 일본과 같이 역사 왜곡의 진흙창에 빠질 수 없다고 뒷짐만을 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천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남구청의 구명칭 변경 사업을 기회로 삼아 우리들의 방식으로 이 시간의 역사를 기록하며 후세들에게 과거의 역사를 재조명할 사건을 만들고자 합니다.

‘미추홀 백제’

인천광역시에는 중구, 동구, 남구, 서구, 남동구 등 인천 지역 방위에 따라 불려오던 5개의 구 명칭과 함께 지리적으로 평야에 발달한 부평은 평야지대의 풍요를 의미하며 계양구는 고려시대 계양도호부가 있던 고을로 그 이름을 이어 역사성을 갖고 있는 등 연수구, 옹진군, 강화군 등 5개 군구가 지역 역사와 특성에 맞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남구청은 지난 2017년 구민들의 찬반 의견을 모아 인천 최초로 방위 명칭으로 불려오던 ‘남구’를 역사적으로 인천의 옛 명칭이었던 ‘미추홀’을 착안해 ‘미추홀구’로 그 이름을 변경, 새 단장에 들어가 오는 7월부터 ‘미추홀구’로의 새 역사를 시작합니다.

남구청이 개명하는 이 기회에 백제의 발상지 미추홀의 지명을 달아 ‘미추홀 백제’를 홍보하고 백제의 시작 40년을 찾아가는 기회로 삼자고 주장해 봅니다.

백제의 역사의 시작에는 고구려에서 쫓겨 내려온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하며 처음으로 큰아들인 비류와 더불어 미추홀의 문학 산성에 자리 잡았으며 여기에서 둘째 왕자인 온조가 지근의 서울 인근인 위례에 독자적인 정착을 했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소서노의 장자 비류가 미추홀에 자리 잡아 약 40여 년 간 살았다는 역사 자료들이 지금의 ‘비류 백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단초가 됐습니다.

이와는 달리 비류의 동생 ‘온조’가 한강 이남에 자리 잡아 건국한 고대국가는 17년간 정착했던 지리적 명칭을 인용해 ‘위례 백제’로 불리며 이어 477년의 수도로 ‘한성 백제’로 불리는 등 중흥기를 지나며 말년에는 천도한 성읍의 이름으로 ‘웅진 백제’와 ‘사비 백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로, 고대국가 백제의 시작을 같이 준비한 미추홀 4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미추홀에 대해서는 당시의 지역 명을 부쳐 ‘미추홀 백제’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인천의 역사의 가치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으로 찬란했던 고대국가 백제의 시작에 미추홀이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서 비류와 온조의 관계가 따로 묘사된 것과는 달리 왕권을 ‘온조’에게 넘기고 일본으로 넘어간 ‘비류’의 일본 황실과의 관계 설명은 중국 ‘당서’에 기록된 내용과 그 명맥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날 선포’

중국 ‘당서’에 따르면 미추홀에서 백제가 시작됐으며 ‘비류’ 왕자가 ‘온조’ 왕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일본으로 넘어 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울러, 일본 황실의 히로히토 일황은 자신에게 백제의 피가 흐른다고 공식행사에서 밝혀 ‘당서’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삼아 ‘비류’의 백제 출정을 기념하는 ‘백제의 날’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일본 황실의 귀국 행사를 재현하는 포퍼먼스는 훗날 일본이 자신의 황실을 배울 때 ‘미추홀 백제’를 공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역사의 왜곡이 아니라 인천 역사의 팩트를 기록하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역사서 한 줄에 드러난 진실을 찾아 이를 홍보하고 후세에 역사의 지표로 삼도록 노력하는 우리들의 마땅한 역사 행위일 것입니다.

‘미추홀구’의 개명을 위해 역사적 의미를 가져오고 미추홀의 역사적 근거를 위해 백제 건립의 시조 역사를 현실적 해석으로 삼아 백제의 시조를 가져옴에 있어 남구청은 ‘미추홀 백제’의 새로운 역사 해석을 남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해 ‘백제의 날’ 선포로 백제는 미추홀(인천)에서 시작해 700년의 역사를 이어간 고대 국가임을 밝혀 역사에 인천을 남기고 일본 황실 혈통에 인천 ‘미추홀’에서 출정한 ‘비류’가 있음을 알리고 이를 역사의 기록으로 정리하자는 취지입니다.

인천 역사에 새겨지는 ‘미추홀 백제’

인천이란 지역에 대해 역사에는 고려시대의 ‘강도’ 역사와 대한 제국의 개항기의 개항장 그리고 근대기에 인천상륙작전이란 민족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역대 국가들 가운데 문화적으로 그리고 외교정책과 무역 활성화에 있어 가장 황금기를 누렸던 국가로는 고대 백제국 700년이 르네상스를 구가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제 역사의 시작에 인천이 함께한다는 점과 당시의 백제와 지금의 인천이 갖고 있는 특성으로 국제공항과 항만으로 세계화의 전초기지, 그리고 개항을 통한 문화 르네상스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들이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천에 백제의 역사를 스토리텔링 한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 인천이 써내려갈 역사에 새로운 지표이자 국제도시 인천으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이 시작하는 백제의 역사 지표에 인천은 그 지명을 담은 ‘미추홀 백제’의 정착과 ‘백제의 날’을 선포해 일본 황실의 역사에 ‘비류’를 담고 이어 ‘미추홀’을 담아 일본과의 역사 전쟁에서 교육, 문화, 예술, 관광의 선봉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천게릴라뉴스 발행인 최도범 올림=

최도범 발행인 ingnews@ingnews.kr

<저작권자 © 인천게릴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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